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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의 기록, 나의 일기장들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기록이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가끔은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악필로 일기장에 간단한 기록을 남기고, 잘 쓰는 글은 아니지만 블로그를 통해 나의 기록을 공유한다. 왜 그리 기록에 집착하느냐고? 글쎄, 내 일생에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 멋진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어서라고나 할까.

 

하지만 매일매일 일기쓰기는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 가장 큰 이유는 여행자의 삶은 의외로! 바쁘기 때문이다. 직장도 없고, 야근을 강요하는 상사도 없지만 나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게다가 어릴 때도 개학전날 밀린 일기를 쓰느냐 정신없던 꼬맹이가 나였는데, 태어날때부터 존재하지 않던 '부지런함 DNA'가 서른이 넘어서 갑자기 솟아나올리가 없잖아?!

 

일기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기장과 마주치면 죄책감이 들었고, 그때마다 난 배낭 깊숙히 일기장을 밀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나는 배낭 한 구석을 차지하던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찍었던 수백 아니 수천장의 사진, 여기저기 남겨둔 작은 메모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일기를 쓰려고 펜을 잡으면 그 날의 사건은 물론 신랑이 어떤 옷을 입었고, 우리가 어디서 물을 한 병 사먹었는지 하는 어쩌면 별로 특별하지 않은 자잘한 기억들까지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어제, 한 달전 아니 일 년전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날까지도.

 

참 이상하다. 예전에 (여행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 있을 때) 예쁜 펜으로 플래너를 정리하려면 일주일 아니 불과 2~3일 전에 있었던 일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었는데, 날마다 간단하게 3~4줄만 적으면 되는 플래너를 채워넣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점점 빈칸이 늘어갔었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난 비로소 온전한 하루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여행자다보니 자연스레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어졌고,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자주 만났던 내 시간을 탐내는 (혹은 내 시간을 죽이는) 사람은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다. 낯선 장소와 사람들속에서 매일매일 다른 하루를 보내다보니, 아침밥을 먹는 일상적인 일 조차도 특별함으로 기억됐다. 하루 24시간이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지, 얼마나 가치있게 보낼 수 있는지 일기를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gIcon 도플파란 2013.09.26 09:33

    일기라.. 저도 요즘 안쓰고 있네요... 한 2일 정도... ㅎㅎ

  2. BlogIcon 바람처럼 2013.09.26 09:55

    전 여행의 매력을 소개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죠. 떠나기 전엔 기대감에 즐겁고, 다녀온 후에는 곱씹을 수 있어 즐겁다고. 저도 여행을 할 때와 다녀온 후 이상하게 기록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일기도 꼬박꼬박 쓰고요. ㅎㅎ

  3. 강윤기 2013.09.26 18:32

    와닿는 글들♡ 멋져용! 온전한 나의 하루를 갖는 느낌 이번 여행때 완전 느꼈답니다.. 오늘은 정말 회사를 뜨고 싶은 날이네요 ㅠ

    • BlogIcon 빛나_Bitna 2013.09.27 00:27 신고

      가끔 생각이 날때가 있어. 회사에서 어이없는 회의 끌려들어가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앉아있던거... 내 시간을 갉아먹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4. BlogIcon nonie 2013.09.26 19:38

    저에게도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어요.:) 어쩌면 여행에서 가장 귀하게 얻는 것은 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 BlogIcon 빛나_Bitna 2013.09.27 00:32 신고

      맞아요. 시간, 진짜 내 시간 그게 정말 큰 선물인것 같아요.
      꼭 떠나야 할 수 있는거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좀 없는데요, 떠나지 않으면 방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 현실이더라구요. ㅠ

  5. BlogIcon 하블리 2013.09.27 01:34

    그날그날 기록하는 습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첫 여행 갔을 때 귀찮아서 안쓰고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쓰려고 했는데 망했어요ㅎㅎ
    집에 가니까 머리가 멍한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더라구요

    • BlogIcon 빛나_Bitna 2013.09.27 06:28 신고

      ㅋㅋㅋ 귀국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함정이죠!
      아마 사진보시면서 기억을 돌이켜보면 생각나는게 많으실거예요. :)

  6. BlogIcon jjangmi 2013.09.27 05:08

    전 일기까지 자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한번씩 남기고, 전 노트보단 아이폰 다이어리 어플 다운 받아 쓰고 있는데....귀차니즘으로 인해서 정말 쉽지가 않아요 ;;;;;; 근데 지금까지 썼던것들 다시 한번씩 읽을때마다 그때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쓰는걸 멈출 수 없는거 같아요 ㅎㅎㅎ 나중에 엮어서 책으로 출판해보세요~너무 멋질꺼 같아요^^

    • BlogIcon 빛나_Bitna 2013.09.27 00:36 신고

      그쵸?! 기록이 참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아요. ㅠㅠ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은것처럼요.
      저도 장미님처럼 블로그나 일기장 보면서 혼자 만족하며 지낸답니다. ㅋㅋ

      + 요즘 워낙 글솜씨, 사진솜씨 좋은 분들이 많다보니...
      출판이란 것은 제게는 뭐랄까.. '이상형의 남자'처럼 꿈만 꾸는 존재랄까요? ㅋㅋ

  7. BlogIcon 토종감자 2013.10.02 16:45

    우와. 완전 초공감 하고 갑니다. 온전히 내 시간을 갖고, 기록이 즐거워지는 순간들.
    숙제로 쓰는 일기가 아니라 나를 위해 쓰는 기록들.
    저도 가끔 지난주에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2-3년전 여행을 포스팅할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뭘 했는데, 세세하게 기억이 나서 혼자 놀라곤 합니다. 무슨 썰렁한 농담을 했었는지, 뭘 먹었는지, 지나가다 본 사람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게다가 사진이나 메모가 있다면 그날 하루를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끄덕 끄덕 거리면서 읽고 가요 ^^

  8. Jamie Kim 2013.10.02 17:45

    한번더 제 자신을 돌아보게끔하네요~

    뭔가를 또 느끼고 가네요~^^;

  9. BlogIcon 꿋꿋한올리브나무 2013.10.14 16:25 신고

    아...
    저도 온전한 하루가 많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사무실에서 나의 시간을 탐내는 사람들을 만나셨다는 대목에서 격하게 공감합니다..
    회사일 가사일 육아에서 해방되고픈..
    즐거운 하루 되세요! 빛나님!

    • BlogIcon 빛나_Bitna 2013.10.15 02:18 신고

      시간은 참 소중한건데 다른 사람 시간까지 탐내는 이들이 꼭 있지요. 안타까운 현실.. ㅠ

      좋은 하루되시구요, 저는 몸에 유연성을 좀 가꿀겸 스트레칭 좀 할라구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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