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을 시작하고 1년째 되던 2013년 9월, 짧은 스페인 세비야 생활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어는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언어였고, 중남미 여행에 필요한 언어이기도 했으니까. 난생처음 경험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여행이 아닌) 외국생활에 나는 묘한 설레임과 기대감에 벅차올랐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의 스페인 생활은 영화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스페인어는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일 년간 쌓여온 여행의 피로가 나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으니까. 한 달이 지나고 나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시간을 원망하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시간과 돈을 버리게 되진 않을까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나를, 우리 부부를 자꾸만 집안으로 몰아넣었다.
세비야 시내를 달리는 말
넌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니?
햇빛이 좋았던 어느 날, 거리에서 발굽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마차를 보았다. 문득 내가 저 말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변은 모두 가린 채, 앞 만보고 달려가고 있으니까. 이 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는데, 어느새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던거다.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래, 내가 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어했는가? 내가 왜 스페인 생활을 계획했었는가? 내가 원했던 것은 어학시험 성적표가 아니였다.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맛있는 음식을 직접 주문해 보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표였다. 잔뜩 끄적여놓은 단어장속에서 난 잠시 내가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었었나보다.
언제나 아름다운 에스파냐 광장
그 날부터 우리는 달라졌다. 시간이 될때마다 집밖으로 나갔고 더듬더듬 사람들과 대화하기 시작했으니까. 슈퍼에서, 레스토랑에서, 축구장에서, 거리에서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속도로 말하긴 했지만 ㅋㅋ) 우리 부부를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3개월의 스페인 생활이 끝났고, 우리의 스페인어는 여전히 형편없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만족한다. 누군가는 1박 2일 스쳐가듯 여행하는 이 작은 도시의 소소한 매력을 우리는 경험했고, 나는 이제는 스페인어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으니까! 나 이런 여자임!
트리아니로 가는 다리
많은 사람들이 눈 앞에 있는 목표를 쫓는 삶을 살아간다.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가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해 놓칠 수 있는 것도 많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에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내가 가진 가능성은 무엇인지, 내 옆에 숨겨진 인생의 기회는 무엇인지... 내가 왜 그 목표를 쫓고 있는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젠가부터 우리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잊은 채, 앞으로 달려가기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눈을 가리고 달려가는 말처럼. 아주 잠깐만 고삐를 놓고 주변을 둘러보자. 스쳐 지나가 버리기에 세상은 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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