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홀릭, Travelholic/비하인드 세계일주 Behind Travels

온전한 나의 하루를 갖는다는 것

빛나_Bitna 2013. 9. 26. 08:51

 

일 년의 기록, 나의 일기장들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기록이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가끔은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악필로 일기장에 간단한 기록을 남기고, 잘 쓰는 글은 아니지만 블로그를 통해 나의 기록을 공유한다. 왜 그리 기록에 집착하느냐고? 글쎄, 내 일생에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 멋진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어서라고나 할까.

 

하지만 매일매일 일기쓰기는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 가장 큰 이유는 여행자의 삶은 의외로! 바쁘기 때문이다. 직장도 없고, 야근을 강요하는 상사도 없지만 나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게다가 어릴 때도 개학전날 밀린 일기를 쓰느냐 정신없던 꼬맹이가 나였는데, 태어날때부터 존재하지 않던 '부지런함 DNA'가 서른이 넘어서 갑자기 솟아나올리가 없잖아?!

 

일기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기장과 마주치면 죄책감이 들었고, 그때마다 난 배낭 깊숙히 일기장을 밀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나는 배낭 한 구석을 차지하던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찍었던 수백 아니 수천장의 사진, 여기저기 남겨둔 작은 메모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일기를 쓰려고 펜을 잡으면 그 날의 사건은 물론 신랑이 어떤 옷을 입었고, 우리가 어디서 물을 한 병 사먹었는지 하는 어쩌면 별로 특별하지 않은 자잘한 기억들까지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어제, 한 달전 아니 일 년전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날까지도.

 

참 이상하다. 예전에 (여행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 있을 때) 예쁜 펜으로 플래너를 정리하려면 일주일 아니 불과 2~3일 전에 있었던 일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었는데, 날마다 간단하게 3~4줄만 적으면 되는 플래너를 채워넣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점점 빈칸이 늘어갔었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난 비로소 온전한 하루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여행자다보니 자연스레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일이 없어졌고,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자주 만났던 내 시간을 탐내는 (혹은 내 시간을 죽이는) 사람은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다. 낯선 장소와 사람들속에서 매일매일 다른 하루를 보내다보니, 아침밥을 먹는 일상적인 일 조차도 특별함으로 기억됐다. 하루 24시간이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지, 얼마나 가치있게 보낼 수 있는지 일기를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